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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아버지는 속으로 운다.

아버지는 속으로 운다!

 

 

 

봄이 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충남의 알프스라 불리는 칠갑산 기슭, 앞으로는 백마강이 유유히 흐르는 동네, 삼태미 형국의 광다울 이런 곳에서 청주 한가의 뿌리를 잇겠다고, 우리 어머님은 두 번째 부인으로 들어와 500여 년 뿌리 역사를 지닌, 청주한씨 손을 잇기 위하여 아버지 51세의 늙은 나이로 나를 출산하게 되었다. 집안 형제 가족들의 축복을 혼자 받으며, 태어났다.

당시 나의 출생환경은 이러했다. 큰어머님께서 딸만 오 형제를 낳고, 아들을 출산하지 못하자 청주한씨의 족보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씨받이를 들여와, 아기를 출산하고 돈으로 사례하는 방법이 가능하였던 시대적 환경이었으나, 큰어머님 엄마께서 우리 어머니를 자기 딸 밑에 천거해주셨다. 이처럼 아들 출산이 가문을 이어가는데 중요한 부문을 차지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온 가족들의 기다림과 축복 속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가진 것이라고는 논 여남은 마지기, 밭이라, 고작 한 이백여 평밖에 없는, 가난한 집의 장손이 되었다.

그러기에 내가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않아, 중학교 진학을 못 하게 되면서, 방황하고 갈 길을 한동안 잡지 못하고 헤맨 시간도 있었다.

그렇게 태어난 이유는 시대적으로 뿌리의 이어짐이 그렇게 중요시하던 역사적 현실이기도 하였다.

 

그래도 잘살아 보겠다고 별이 별짓을 다 해가며, 대안을 찾은 것이 통신 교육방법이었다. 이 길을 통하여 중, 고등과정을 수료하고 고등학교는 검정고시를 치르지 못해 학력 인정도 받지 못하였다. 어쩌게나 공부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서 주경야독으로, 하루의 일과가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멀지 않은 이웃집에서 서당이 있어, 쌀, 보리 조금씩 훈장님 새경으로 드리고,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병행하였다. 한문 공부하는 동안 나의 서예 특기를 훈장 선생님께서 발견하게 되어,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서울에 가서 서예 공부를 하기로 어머님과 상의하고, 상경하여 종로에 있는 성균서예학원에서 공부하다 보니, 강사님과 주의 동료들로부터 칭찬을 자주 받았다.

 

그리고 공부를 마치고 다시 집에 돌아올 즈음, “제5회 신인 예술상”이 공고되었다. 불철주야 작품을 준비하여 출품하게 되었다.

작품으로는 윤선도 선생의 어부사시사 춘(春) 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논 못자리 철이 되어 바쁘게 귀농하였다.

이러한 과정들이 자본이 되어, 7급 국가공무원 공채에 합격하여 국가공무원으로 임용되어 35년이란, 긴 여정을 공무원으로 사명을 다하고, 퇴직하면서 보국훈장 보국포장을 수여 받았다.

 

물론 시골 촌놈이 7급 국가공원 꿈에도 상상 해보지 못한 일들이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로 실행에 옮겨졌다.

 

그리고 슬하에 아들 녀석 두 놈이 태어났다. 공무원 급여로 생활비 아이들 교육비 충당에도 매우 힘든 현실이었다.

그리하여 집사람도 빙그레, 판매원, 화장품 외판을 하면서 생활비를 보태며 생활하였다.

 

어언 정년퇴직과 두 아들이 장년이 되어 손자, 손녀들이 성년이 되어간다.….

 

퇴직 후에는 사회생활을 통하여, 평생학습과 마을공동체 활동을

추구하면서 더불어 사는 동네에서 행복을 추구하기도 하였다. 내 삶의 숭고한 가치를 추구해가며, 평생 학습자로서, 하루하루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저연 퇴직시 보국훈장 보국포장 수상

 

어쩌다 나이가 칠순이 넘어 팔십에 가까워지니, 신체적으로 하나씩 고장 난 부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치아가 고장 나 틀 리를 하고, 일 년이 채 되기도 전에 다시 고장 나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완전히 틀린 비용도 적은 돈이 아니었디. 내 어려운 소식을 듣고 두 아들이 주선하여 비용을 처리해주었다.

 

그러나 일 년이 채 안 되어 또다시 천만 원의 임플란트 비용이 들어가게 되었다.

도저히 내 힘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금액이었다. 어쩔 수 없이 두 아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하루하루 생각해 오던 중, 참말로 고뇌에 찬 많은 생각과 고통을 겪었다.

 

그동안 아버지로 어쩌다가 이런 상황을 처리하지 못하고, 아들들에게 전화를 들고 상황들을 이야기해야 하는지 나름, 자존심도 없고, 아버지로서 할 일들을 다 하지 못하고, 이러한 상황을 만든 것이, 참으로 수치스러워 모든 생각을 잠시라도 잊고 싶었다.

 

어려운 상황을 설명하면서 속으로 흐르는 눈물을 감당할 수 없었다. 아버지로 남보다 좀 더 멋지고, 근사한 아버지로 행동하고 살아가고 싶었는데, 주어진 오늘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그리 넉넉지는 못해도 보통 사람들의 아름다운 가치를 추구해가며, 존경받는 아버지로 살고 싶었는데, 세상은 나를 녹녹하게 놓아주지 않았다.

 

속으로 우는 아버지의 눈물이 나의 부족함을 말해주는 것 같아 창피스럽기도 하다.

한동수 가족

 

그러나 아들들이 무슨 대답 할까? 상대방의 사정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수화기를 돌리면서 혹시나 무슨 대답이 나올까? 노심초사했는데, 즉시 진료받으시라고 이야기 해주었다.

 

그래, 고맙다고 말하는, 내 눈가에는 눈물이 송알송알 맺혀있었다. 혹시나 전화를 받고 요즘 생활이 어렵다고 말했을 때는 나의 마음을 어떻게 추스를 것인가,

아버지의 눈물을 감추면서, 내가 못나서 별의별 생각들이 내 머리를 스쳐 간다.

 

이렇게 속으로 흘리는 눈물이 아버지의 아들들을 사랑하는 눈물이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남들보다 옷 한 벌집 한 채 변변하지 못하게 해 주었는데, 내 몸 같은 분신들이다. 남자보다 강한 것이 아버지가 아닌가 싶다.

가족이 내 가까이 있어 행복하다.